이제는 낡은 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지식인'
그 존재가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예전처럼 대중을 계몽하고 앎을 설파하는 지식 자체의 쓸모가 쇠했거나
혹은 지식인이 시대에 뒤처지게, 혹은 시대를 구태의연하게 만들며
뭇 사람의 비판을 받을 만한 역사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식인'을 화두 삼아
형식주의, 인간론, 생태론, 공동체론을 논하는 이 책은
과연 이 시대에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까에 대해
진지하고도 세밀하게 탐구한다.
나 는 여기 실린 글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였으면 하는 교만한 바람을 갖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힘든 현실 속에서 함께 부딪치며 살아가는 모든 이웃에게 나무젓가락만 한 암시와 위안, 자극의 소재가 되었으면 하고 주제넘게 바랄 뿐이다.
(/ '머리말' 중에서)
이 시대 '지식인'의 소명은 무엇인가?
오 랜 시간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해온 박호성 교수가 정년퇴임을 앞두고 [지식인]을 펴냈다. 이 책은 저자가 '지식인'으로 살았던 자신의 학문적 삶에서 전환점을 맞이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꼿꼿한 행보를 더욱 철저히 요구하는 우리 사회의 모순적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늙고 추함"의 뜻을 가진 노추老醜를 자신에게 투영시키며, 현재의 자기 본모습이라고 털어놓는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지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도, 한편으로 그 자신 몸담아온 '지식인'과 '지식'을 지나칠 수 없어 다시 펜을 잡는다. 또한 그는 사회과학자의 소명을 '길거리 청소'로 본다. 투박한 작업복을 입고 사회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는 국가적 오물을 처리하는 방안을 탐구하는 것...... 그는 이 책을 통해 사회과학자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갖가지 문제를 지적하며, 그 근본적인 원인을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일관되게 지배해온 이념인 '후딱후딱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 즉 '대충대충' '빨리빨리, 그러나 아무렇게나'의 정신이 바로 그것이라 일컬으며 오늘날을 '불통'의 시대라 한다. 최근 발생한 세월호 사태, 서울 지하철 사고 등을 통해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 그 심각성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러한 '배반과 혼란의 시대적 현실'에 직면하여 무엇보다 비판과 동시에 화합의 길을 걸어야 할 지식인의 소명을 역설하고 이를 다시금 대중에게 호소하고 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는 수많은 '지식인'이 양산되고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공부했다고, 단순히 학위를 땄다고 해서 모두 지식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진정한 지식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양'해야 할 모습은 무엇이고 '지향'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를,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서 있어야 할 지점이 어디인가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지식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지식인 모두가 청룡언월도로 몽당연필을 깎지 말았으면 좋겠다. 천리마더러 화물을 나르지 않는다고 야단치지도 않았으면 한다. 야구방망이더러 '너는 이를 쑤실 수 없는 꼬락서니를 하고 있다'고 비아냥대는 이쑤시개도 되지 않았으면 한다." 따라서 이 책 [지식인]은 저자가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포함한 모든 '지식인'을 바라보는 냉철한 비판이자 스스로에 대한 반성문이다.
또한 평소 아카데미즘의 경직성과 폐쇄성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저자는 '저널리스틱한 접근'과 '아카데믹한 분석'을 생산적으로 결합한 방식을 자신의 학문 연구 및 저술의 본바탕으로 삼고 있다. 이는 구체적인 삶의 현실에서 이론의 광맥을 탐사하고, 이론을 통해서는 삶의 여러 흔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 방식이다. 즉 이론 속에서 삶을 찾고, 생활 속에서 이론을 관조하는 태도로 이론과 현실의 유기적 상관성을 추적하는 데 힘써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암호나 고급 사치품 같은 이론이 아닌 '생활필수품' 같은 지식을 담아내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저자는 스스로 이 책을 말썽꾸러기 학생이 쓴 반성문 모음집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지식인]이 책상에 앉아서 읽을 수도 있고, 편하게 누워서 읽을 수도 있는 스승 같으면서도 친구 같은 책이 되기를 바란다.
끊이지 않는 한국 사회의 병폐 ... '개인'에서 '거인巨人'으로
저 자는 본격적으로 '지식인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내기에 앞서 윤리적이고 당위론적인 '공자 왈, 맹자 왈' 대신, 쓰리고 아프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식인들이 지적 활동을 전개해나가는 모순적인 기본 토양의 성분 및 특성에 대한 심층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제1부 '한국 사회의 지적 풍토'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여러 질환과 함께 지식인을 양성한다고 하는 교육 현장의 실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형식주의' '소집단 애국심' '컬러리즘' '사익 절대주의' 등을 한국 지성계의 풍토병으로 보고, 이를 문제시하고 있다.
'후딱후딱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결과, 겉으로는 당당한 듯하나 속으로는 연신 곪아터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저자 자신이 직접 체험한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을 통해 보여준다. 고지점령식 밀어붙이기와 전투태세 완비식 군사문화가 사회 전반을 갉아먹는 동안, 우리 사회에 굳건하게 뿌리내린 이러한 '형식주의'는 오늘날에도 사회 곳곳에 깊숙이 남아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저자는 '컬러리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색깔'을 정치색뿐만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에까지 연결시키는 오늘날의 '색깔론'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한국에서 합당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최근 종북 문제, 내란 음모,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간첩사건 증거 조작, 정당 해산 문제 등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분석을 토대로, 교육 현장의 '요점과 급소'만을 중시하는 교육철학, 특권계급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만 해도 '정치교수'로 치부되는 대학의 현실, 희망이 몰락하는 '인문학의 위기'에 이어 우리 사회가 '영혼 없는 기계'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 이른다. 현대인들의 인격과 도덕이 수단화되고, 각 개인은 기계 부속품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상황에서 '인간의 영혼'은 시들어갈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악순환의 반복은 우리 사회를 현대판 '시시포스의 신화'로 둔갑시킨다. 저자는 오늘날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한마디로 '거인주의'라 칭한다. 자유주의의 철학적 토대는 개인주의다. 그런데 자유주의가 표방하는 '개인'은 곧 '거인巨人'이다. 힘 있는 개인인 '거인'만이 자유주의 사회에서 추앙받는 '자유경쟁'에서 궁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으로 산다는 것
본 격적으로 '한국 지식인의 시대적 좌표'를 파헤치는 제2부에서는 '지식인이란 과연 어떠한 존재인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지식인의 사명을 '저항'과 '어용'으로 양분한다. 지식인은 "지식을 어떻게, 누구를 위해 활용하는가에 따라 자신이 헌신하고 연대할 계층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율적 존재"다. 이것이 지식인의 권리이자 굴레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지식인은 기존 체제와 질서를 옹호하고 합리화함으로써 지배 세력에 봉사할 수도 있고, 반대로 그 모순과 부조리를 파헤침으로써 그로 인해 신음하는 피지배자의 편에 설 수도 있다. '저항'의 지식인이 될 것인가, '어용'의 지식인이 될 것인가는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저자는 '캄파넬라'를 사례로 들면서 '저항적 지식인'의 역사적 소명과 당위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즉 "교육은 대중이 읽을 수 있도록 만들긴 했으나 무엇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분간하도록 만들지는 못했다"면서, 지식인은 '보편성'의 거울을 끊임없이 들고 다니며 여기에 특수성의 모순을 비춰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특히 이러한 보편성과 특수성 간에 내재하는 모순을 꿰뚫어보고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지식을 활용하는 자가 바로 저항적 지식인이라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특히 '연대' '자연살이' '공동체 민주주의' 등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이라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이상적 가치들의 정신을 분석?제시한다. 분단 상황('민족모순')과 더불어 양극화 현상('계급모순')이 현저하게 나타나는 한국 사회에 대한 해답으로 '4대 연대운동'이라는 긴급 제안을 내놓는다. 즉 '국제적 연대' '남북 연대' '한일 양심 세력의 연대' '노동운동 및 시민운동 양대 세력의 연대'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과학자답게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에 대한 비판적 점검과 더불어 지식인의 다양한 시대적 좌표에 대한 사회과학적 조명을 마무리하며, 우리의 앞날을 기약해주리라 굳게 믿고 있는 '전통주의적 진보주의'라는 획기적인 미래지향적 지표를 제시한다. 이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살아가야 함을 역설하며 자연과의 연대 또한 강조한다. '인간 없는 자연'은 문제될 게 전혀 없지만, '자연 없는 인간'은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우면서 '생태계'는 인간의 삶의 터전이자 자연과 뗄 수 없는 운명공동체임을 주장한다.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함께 되돌아갈 인간은 이제 '만물의 영장'이라는 미몽에서 벗어나, 자연친화적인 인간의 기본권 신장에 목표를 둔 '환경공동체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인간에 의한 '자연의 기본권' 쟁취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생태공동체 민주주의'를 통합해 '생태환경' 민주주의, 요컨대 공동체 민주주의로의 종합을 최종 목표로 내놓으며 2부를 마무리한다.
한국 시민사회가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하다
제3부 '한국 지식인 사회의 행로'는 저자 자신의 오랜 교육 현장 체험에 기대어 대학생활을 막 시작한 신입생과 이제 대학과 결별하는 졸업생에게 보내는 당부와 격려의 메시지다. 지식인 사회 혹은 지식인을 양성하는 사회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신입생들에게는 학문의 장에 새로이 들어오며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등을 이야기하면서, '지식'보다는 '지혜'를 갖춘 학도가 되라고 사기를 불어넣는다. 또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게 될 졸업생들에게는 졸업이라는 그들이 이루어낸 장구한 승리의 자그마한 시작을 격려하며 '도전에 한계를 두지 말고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이에 덧붙여 이들이 결국엔 모두 합류하게 될 21세기 시민사회가 '참여' '복지' '통일'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민사회를 향한 저자의 절박한 요청을 '시민 참여와 국민 복지 확대로 민족통일을'이라는 21세기적 구호에 담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역사적 과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3생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가 풀어가야 할 역사적 과업과 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짧은 소설 하나를 선보인다. 단편소설 [목격자]는 한 대학교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하루를 뒤쫓는 형식을 빌려 지식인의 '빛과 그림자'를 추적한다. 주인공 F 교수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인은 '단사표음'하며 청빈하고 소박한 생활 태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청빈한 학자로 알려져 학생들로부터 깊은 존경을 한 몸에 받는다. 불의에 항거하고 정의에 항복할 줄 아는 양심적 지식인이라는 평판까지 따라다닐 정도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술집을 드나들고, 땅 투기에 열성을 보이며 '판자촌이 하루빨리 철거되기'를 바라는 이중적인 인물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뿌리 깊은 이중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과거 심하게 찍힌 '요주의 인물'이었던 F 교수가 진보 성향의 글을 쓰고, 보안대원이 찾아와 그를 '빨갱이'로 치부하는 사건 등을 통해 저자는 당시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살았었는지 슬쩍 내비친다. 아마 적지 않은 교수가 이를 보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까. 이는 한마디로 저자가 그려내고자 한 1980년대 우리의 자화상이다.
저자는 자신이 쓴 단편소설을 스스로가 저지른 '작태'라고까지 표현하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데, [목격자]는 대학교수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이중적 삶의 단면과 폐부를 아프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지성인은 목격자를 두려워한다." 이와 같은 말로 저자는 지식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소설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