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물이 없으면 사이다로!
공기나 물, 늘 함께하는 가족과 친구들, 하다못해 자질구레한 생필품까지도 그것이 부족해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고마움을 모르는 법이다. 공기가 없다면, 물이 없다면?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이다. 물 한 동이를 길어 오기 위해 아주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는 아프리카 대륙의 슬픈 사정은 언제나 남의 일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따금 뜨거운 여름이 되면 가뭄 때문에 애가 타는 마을이 있기 마련이고, 그 소식을 듣는 우리들은 모두들 생각한다. 정말 물이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그림책 [달콤한 목욕]은 가뭄이 들어 물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무더운 여름이니만큼 단 한 바가지, 단 한 양동이의 물이라도 너무나 절실하고, 사람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 오랫동안 줄을 서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런!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까맣게 모른 채 공놀이에만 열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공놀이를 마친 세 사람은 시원한 목욕을 위해 목욕탕에 갔다가 비로소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물이 없으면 불편하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신나게 뛰어논 뒤라면,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고 목은 갈증으로 타 들어간다면 더더욱. 으악, 큰일이다. 이를 어쩌지?
그런데 결핍이 가져온 불편함은 뜻밖의 재미를 가져다주기도 한다. 세 사람은 냉장고에 가득 든 시원한 사이다를 발견하고는 사이다 목욕을 시작한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졌다면 사이다 목욕 같은 건 절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이다로 목욕하는 일은 공놀이보다 훨씬 즐겁다. 거품이 쉴 새 없이 보글보글 일어나 짜릿하고, 원하면 바로 떠 마실 수도 있다. 그러니 투덜대는 대신, 불편함을 즐거움으로 전환하라!
이 그림책에서 보여주는 사이다 목욕은 거침없는 상상력을 드러내기 위한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이 그림책을 함께 작업한 작가들이 몸이 불편한 장애인들이라는 점을 알고 보면 더 의미심장해 보인다. 우리가 절대 알지 못할 불편함을 일상적으로 체험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우리보다 더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결핍을 또 다른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는 놀라운 비밀을 터득한 것은 아닐까? 장애인들을 필요 이상으로 동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과도하게 신비화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달콤한 목욕]에 담긴 이야기와 그림을 보면, 이 책을 함께 쓴 사람들이 얼마나 삶을 긍정하며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 잘 이해하게 된다. 이만한 호연지기란 흔한 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그림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내리는 비는 더없이 시원하다. 일상이 고단하고 지루한 모두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그림책이다.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장애인 재활 프로그램 e-북 만들기
[행복한 우산 마을]과 [달콤한 목욕]은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장애인들이 재활 프로그램으로 진행한 e-북 만들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지적장애, 뇌성마비, 간질, 언어마비, 다운증후군 등 여러 중복장애를 가지고 있는 6명의 저자는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에 녹여내었고, 그 결과로 탄생한 e-북은 예상보다 놀라운 반응을 얻었다.
많은 독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바람의아이들에서 수정작업을 거쳐 종이책으로 출간하게 된 결과물을 떠나서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를 희망하여 모인 여섯 명의 저자가 함께 한권의 그림책을 만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의견이 부딪히고, 연대와 소통이 필요했을지는 어림잡아 상상해보아도 결코 만만하지 않았으리라.
책이 만들어진 과정이 하나하나 기록되어있는 홀트일산복지타운의 진행일지에는 저자들이 어떠한 의견들을 통해 이 동화를 구성하게 되었는지, 장애가 있는 저자들에게 어떠한 환경을 제공해야 가장 즐겁게 작업을 진행해 나가는지, 몸이 불편하여 마우스를 잡기도 힘들어하던 이들이, 터치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태블릿 PC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게 된 과정 등의 이야기가 프로젝트의 기획과 진행을 맡은 복지사들에 의하여 세세하고 애정 어린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 책의 저자 소개에 작업에 직접 참여한 6명의 저자 외에도 프로젝트 진행이라는 표기 아래 이창신, 김태황, 김용숙, 정승구, 박정숙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특정 대상이 실재하는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법을 평생 배우며 살아가는 인지장애인들에게는 판타지를 이해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2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이 아마추어 작가들은 이 멋진 동화를 만들기 위해 스스로의 실생활에서 스토리를 이끌어 내는, 지난하지만 진실하고 자연스러운 작업을 거쳐야했다. 불편한 몸 때문에 집밖 나들이가 쉽지 않다는 핸디캡은 강아지가 배달해준 우산을 타고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상상으로, 가뭄으로 물이 나오지 않는 불편은 평소에 해보지 못한 사이다 목욕이라는 즐거움으로 전환이 되었다. 장애와 불편함이 즐거움과 재미로,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과의 연대와 소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환상적인 동화 속뿐 아니라 하루하루 모여 머리를 맞대었던 여섯 저자의 현실에서 동시에 일어난 환상적인 사건(?)이다.
이 합동 작업의 결과물은 애초의 목적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프로그램 과정에서 어떠한 효과가 일어났는지와 별개로,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하다. 유쾌하고 기발한 이야기는 독자의 통념을 시원스럽게 깨주며, 우스꽝스럽고 활달한 그림이 그림책 특유의 신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종이책에 앞서 제작한 e-북에는 매체적 특성상 해외의 다양한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영문을 함께 기입했다는 이창신 복지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순수한 자부심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즐겁게 페이지를 넘기며 자유로운 상상에 빠지는 동안, 그 기저에 담긴 삶의 가치를 느껴볼 수도 있다. 이 그림책이 담고 있는 모든 것은 진짜 예술인 것이다.
작가 소개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지적장애, 뇌성마비, 간질, 언어장애, 다운증후군 등 크고 작은 여러 가지 장애를 가지고 있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동화책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만들어진 [달콤한 목욕]은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김현군,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는 김영애, 미적 감각이 있는 김신화, 그림 그리기를 매우 좋아하는 박경덕, 개 조련사가 꿈인 박순열, 도자기 만들기에 소질이 있는 양준혁까지 평균 연령 30대 중반인 여섯 명의 저자가 참여하였습니다.